'백신 음모론' 앞세운 트럼프 행정부와 과학적 소신을 지키려는 CDC의 정면충돌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 美 보건복지부 장관 (사진= 로이터 연합뉴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 수장의 전격적인 해임을 둘러싼 논란이 전방위로 확산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공중 보건 시스템에 대한 깊은 불신을 드러내며 '개혁'을 명분으로 내세운 반면, CDC 내부와 과학계에서는 '반지성주의 음모론'이 국민의 생명을 위협한다며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이번 사태는 단순한 인사 문제를 넘어, 과학과 정치의 정면충돌 양상으로 비화하며 미국 사회 전체를 뒤흔들고 있다.
◇ "기관 바로잡겠다"는 보건장관 vs "사람들 지키겠다"는 CDC 국장
갈등의 중심에는 백신 반대 운동가 출신인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 보건복지부 장관이 있다. 그는 28일(현지시간)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CDC를 "문제가 많은 기관"으로 규정하며 "우리는 이를 바로잡고 있다"고 공언했다. 케네디 장관은 CDC가 백신을 현대 의학의 위대한 성취로 평가한 것을 '허위 정보의 매개체'라고 폄하했으며, "그곳에서 더 이상 일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있다"며 노골적인 인적 청산 의지를 드러냈다.
백신과 자폐증의 연관성을 주장해 온 케네디 장관은 과거부터 "백신이 자폐증을 유발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CDC가 거대 제약회사의 로비에 굴복해 불필요한 백신을 권고하고 있다고 비난해왔다. 그의 이번 발언은 자신이 직접 해임한 수전 모나레즈 CDC 국장과, 그녀의 해임을 전후해 CDC를 떠난 호흡기 및 신종 질병 백신 담당 고위 관계자 4명을 정조준한 것으로 해석됐다.
사건의 발단은 케네디 장관이 모나레즈 국장에게 이들 고위 관계자들의 해임을 지시하면서 시작됐다. 모나레즈 국장은 이 요구를 거부했고, 이어진 자신의 사퇴 요구마저 일축했다. 결국 케네디 장관은 임명된 지 약 한 달밖에 되지 않은 모나레즈 국장을 전격 해임했다.
모나레즈 국장 측 변호인단은 "그녀가 케네디 장관의 비과학적이고 무모한 지시를 따르기를 거부했다"며 "'정치적 의제'를 따르기보다는 국민을 지키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고 밝혔다. 리처드 베서 전 CDC 국장대행 역시 기자회견에서 모나레즈 국장과의 통화 내용을 공개하며, 그녀가 "불법으로 간주되는 일과 과학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을 동시에 요구받았다"고 토로했다고 전했다.
백악관은 케네디 장관을 적극 옹호하고 나섰다. 캐롤라인 레빗 대변인은 "모나레즈 국장이 사퇴 요구를 수용했다가 번복하자 트럼프 대통령이 해임한 것"이라며 "대통령은 자신의 미션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을 해고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수전 모나레즈 美 CDC 국장 (사진= 로이터 연합뉴스)
◇ 예방접종자문위(ACIP) 전원 교체…다가오는 회의에 우려 고조
이번 사태는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케네디 장관은 지난 6월, CDC 산하 핵심 자문기구인 예방접종자문위원회(ACIP) 위원 17명 전원을 해임하며 파문을 일으켰다. ACIP는 식품의약국(FDA)이 승인한 백신에 대한 구체적인 접종 권고안을 마련하는 막중한 역할을 수행한다. 케네디 장관은 공석이 된 자리에 백신 반대론자들을 포함한 8명의 새로운 위원을 임명하며 위원회를 장악했다.
문제는 다음 달 18일로 예정된 ACIP 회의다. 뉴욕타임스(NYT)와 워싱턴포스트(WP) 등에 따르면, 이 회의에서는 코로나19는 물론 B형 간염, 홍역, 풍진, 유행성이하선염, 호흡기세포융합바이러스(RSV) 등 국가 필수 예방 접종에 대한 권고안이 주요 의제로 다뤄질 예정이다.
특히 케네디 장관은 영아에게 접종하는 B형 간염 백신에 대해 "매춘부와 방탕한 동성애 남성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막말과 함께 강한 반감을 드러낸 바 있어, 출생 즉시 접종해야 효과적이라는 기존 공중보건 전문가들의 견해를 뒤집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모나레즈 국장과 함께 CDC를 떠난 데브라 하우리 박사는 WP와의 인터뷰에서 "ACIP가 이들 중요 백신에 대한 권고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공포가 CDC 내부에 확산했다"며 "(CDC는) 과학적 리더십을 잃으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비판했다. 또 다른 사임 관계자 역시 로이터 통신에 "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의사로서, 다른 이를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며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보며 더 이상 CDC에 몸담을 수 없었다"고 심경을 밝혔다.
◇ 정치권도 '들썩'…초당적 비판과 청문회 요구 빗발쳐
모나레즈 국장의 해임 사태는 정치권으로까지 확산할 조짐이다. 그녀의 임명을 인준했던 상원 보건교육노동연금위원회에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여당인 공화당 소속의 빌 캐시디 위원장은 SNS를 통해 "위원회 차원의 감독이 필요해 보인다"며 행정부에 대한 견제를 시사했다. 버니 샌더스 의원(무소속)은 이번 사태에 대한 청문회 개최를 공식 요구하며 모나레즈 국장의 해임이 "터무니없다"고 맹비난했다.
과거 모나레즈 국장 인준에 반대표를 던졌던 패티 머레이 의원(민주)은 "모나레즈 국장이 미국의 공중보건을 파괴하려는 케네디 주니어에 맞서 싸울 의지가 있는지 심각한 의문을 가졌었다"고 회고하며 "내가 틀렸다고 말할 수 있어 기쁘다"는 역설적인 성명을 발표, 모나레즈 국장의 입장을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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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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